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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역사관 : 강화도에 위치한 각종
전적지와 유적을 둘러보는데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곳이다. 국난을 극복한 강인한 민족의 저력과 자긍심을 이어받아 민족항쟁의 위업을 기리고
호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1988년 9월 14일 개관하였다. 찾아가는 길 : 강화터미널에서 역사관까지 약 2km정도 거리다. 터미널에서 내린
다음 영등포행 완행버스로 다섯 정거장 정도 가다가 옛 지도소 앞에서 내려 걸어가면된다. 자동차를 가지고 올 경우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바로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강화역사관 이정표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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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려 궁지 : 고려가 몽고
침략시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1213∼1259, 재위)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 든 고려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에 옮겼으며 1234년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1270년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 궁궐과 성은 무너졌다. 그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이곳에 행궁과 강화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다.
이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 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 교육의 터전이 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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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정 : 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라 하였다 한다. 높은 석주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 20년(1744) 중건, 고종 28년(1891) 중수 등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시 이곳에서
청국과 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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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사 :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중종39년(1544)과 선조 7년(1574) 그리고 그후6차에 걸쳐 중수하여 금일에 이르고 있다.
1984년에 대웅전을 건립, 그 이듬해인 1986년에 요사채를 주지 도암 김종칠이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 동편에 있는 우물은
돌틈에서 나오는 샘이 맑고 찬데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거나 흉년이 들때면 별안간에 마르거나 6.25 한국동란에 별안간 흐려져서 먹지 못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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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돈대 :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후 몽고와 줄기차게 싸울때의 외성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조선 인조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이 돈대는 숙종 5년 (1679)에 축조 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7일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 문수산성 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동년 10월 13일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주하였다. 돈대 안에는 조선시대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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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 :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에 있는데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서해바다 아름다운 섬중에 있다. 여기에는 불상을 모신 석실과 마애불이 있는데 석실은 천연동굴속에 탱화를
모시고 21개의 감실에 석불이 안치되어 있다. 마애석불은 높이가 32척 폭이 11척의 관음보살상이다. 32척은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을,
11척은 11면 관음의 화신을 상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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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위치한 이 절은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서기 381)에 고승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고 진종사라 부르다가,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원비 정화왕비가 불전에 옥등을 헌납한 후 전등사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약사전,
범종을 비롯하여 실록을 소장했던 사고지 및 조선 왕실의 족보를 소장했던 선원보각지가 남아 있으며 특히, 선원보각지는 고려시대에 팔만대장경을 판각
봉안했던 장경각이 있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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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 이곳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 (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고종 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로즈) 극동함대 및 고종 8년(1871)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로저스)의 아세아 함대, 고종 12년(1875)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이다. 당시 프랑스와 미국 및 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하여 조선군은
사정거리도 짧고 정조준도 잘 안 되는 열세한 무기로 대항해 싸웠던 것이다. 특히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의 체결을 가져옴으로써 일본 침략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 진에는 병마첨절제사 1일, 군관 11인, 군사 320인, 전선 3척이
주둔하였었다. 이곳은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이기에 호국 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1973년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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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 해발468m의 높이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어 먼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으로 참성단은 그 중간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올라서서 보면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섬이 보이고 맑은날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인다. 참성단 :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해바다 개천절에
이곳에서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며 한편, 전국 체육대회 때마다 대회장에 타오르는 성화는 이 참성단에서 7선녀에 의해 채화되어 대회장으로 봉송,
점화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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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 조선 효종
9년(1658)에 설치 되었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돈대가 축조되었다. 영조
21년(1745)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按海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고종 3년(1866) 프랑스의 극동함대와 치열한 격전
(병인양요) 을 치르었으며, 고종 8년(1871) 미국의 아세아함대(신미양요)가 이 성을 유린하여 우리 수비군은 탄환 및 화살이 떨어지자 어재
연장군 이하 전 장병이 백병전으로 맞서 용감히 싸우다 전인원이 장렬히 순국한 곳이다. |